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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

행복에 대한 고찰: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언제행복을 느끼는가? 행복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리는가? 행복이 왜 중요한가? 어떤 행복이 건강한 행복인가?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가?

by 워킹나무 2024.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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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사는인생, 당신은 행복하며 살고싶은가, 행복하지 않으며 살고싶은가?”

 이러한 질문에 누구든 행복하며 살고싶어 한다. 신기한건 다음의 질문들에서 온다.


“당신은 행복한가?” 많이들 불행하다.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많이들 아니다.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 많이들 모른다.


행복하게 살고싶은 당신이 그러한 소망을 이루고자 한다면, 위의 질문에 1초의 망설임이 없이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미 자신만의 행복이 제대로 정의 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행복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도 모르면서 행복한 삶을 바라는건 대단한 모순이다.


이번 글에서는, 워킹나무의 행복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과 고찰을 공유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사는 독자분들이 자신의 행복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갖고 충만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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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행복함을 느끼지 못했다. 단순한 오락적 즐거움 (예를들면 게임이나 축구와 같은 단체활동) 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확신 했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굉장히 추상적인 느낌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사랑한다’ 라는 표현은 많이 하셨지만, 본인이 ‘행복하다’라는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당신의 감정을 어린 자식에게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어린나이에 돌아가셔서 물어볼 틈도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그 추상적인 느낌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학창시절에는,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하겠지..’ 라는 ‘목표’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억눌러 가며 공부를 했다. 친구들이 PC방에 갈때는 혼자 도서관에 갔고, 친구들이 맛있는 닭꼬치를 먹으러 야자 (야간 자율학습) 를 땡땡이 칠때, 꿋꿋이 자리를 지켰고, 가족들이 야식을 먹으러 갈 때는 독서실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러 갔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미래의 행복한 나에게 투자를 하고 있는거라고 확신 했다.

 

스무살 즈음에,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어떤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내 안으로부터의 두근거림을 귀담아 들으며 사랑 하는 사람을 만났다. ‘사랑’ 이라는 감정도 ‘행복’ 이라는 감정 만큼 난해하고 복잡한 감정이지만, 지능적 감각보다는 동물적 감각이 훨씬 뛰어나다고 믿고 있는 본인이었기에 (달리 말하면 좀더 예민하고 민감하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어떤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이해하는데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나서, 나에게 행복이란 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해주거나 그사람이 즐겁다고 말해줄때 였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위해 살아왔다.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이타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굉장히 이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실은 내가 행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까지 하고, 본인의 박사과정을 위해 같이 유학길에 올랐다. 옛말에 그런말이 있다. 박사란, 수명끈을 줄여서 가방끈을 늘리는 과정이다. 워킹나무 또한 건강과 몸을 갈아가며 (실제로 10kg정도 살이 빠지면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항상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뒤를 추격해 온다. 지금 떠오른 연구 아이디어를 당장에 구현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이미 같은 것을 할 것 같았고, 한시라도 내가 직면해 있는 문제에 대한 생각을 멈춘 다면 영원히 문제를 풀지 못할 것 만 같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발장구를 치고 있지 않으면 수면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도 형식적인 대화만 하게 되고, 모니터 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마냥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이런 지속 불가능한 행동을 하고 있으면 누구나 한 가지 감정이 마음의 병으로 찾아온다. ‘아.. 불행하다.’

박사과정 중, 인간의 기본욕구 (식욕, 수면욕 등) 를 위한 행동 이외로 (어떤 취미던 그 당시에는 사치였다) 우리들만의 의식이 하나 있었다. 하루에 한번은 카페까지 걸어다녀오기. 모니터라는 보이지 않은 쇠창살에서 나와, 발검을 천천히, 굼벵이 같이, 느리게,, 느리게,, 옮겨가며 카페에 도달한다. 걸을 힘도 그리 많지 않았거니와 (30대 초반의 사람이 걸음조차 힘들어 하면 굉장한 이상 신호다), 다시 감옥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최대한 지연 시키고 싶었다. 

 

눈이 허리까지 쌓이는 날씨에 (미국의 북부에는 그러한 동네가 많다), 한손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내 점퍼 주머니에 넣고, 한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나온다. 첫 모금 처언천히 목넘김을 하는 순간, 몸의 긴장은 풀리고 사람의 온기와 커피향에 취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무아지경의 상태가 할짝 핧고 지나간다.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아..  행복하다.’ 불행한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느끼는 잠깐의 여유로움이 내게는 행복이라는 본질에 도달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행복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있으면 매일 느낄수 있는 감정이었다. 즉, 지속가능한 행복감이었음을.

 

끊임없이 몰두해야하는 지속 불가능한 행위를 하기 위해, 지속 가능한 행복감으로 버텨냈고, 박사과정은 무사히 나쁘지 않은 연구실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을 하였다는 기쁨보다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생의 진리 한 모금을 마시고 온 그 느낌에 오히려 초연하다 (졸업식은 가지도 않았다). 행복에 대한 워킹나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는 ‘느림’에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 익숙한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고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느린 행동들을 할때 행복을 느낀다.

 

나는 주말 아침식사를 가족들과 천천히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나는 가족들과 천천히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 다닐 때 행복감을 느낀다.

나는 가족들과 카누를 타고 호숫가위에 둥둥 떠다니면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를 들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나는 가족들과의 느릿느릿한 여행을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책과 함께 동반 하면 그 맛은 배가 된다. 한장 한장, 한줄 한줄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글귀들에 행복감을 느낀다.

 

 

워킹나무의 경험을 바탕으로 행복에 대한 몇가지 질문에 대해 고찰을 해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한낱 어리석은 아저씨의 의견이라고 생각해주면 될 것 같다.

개인의 행복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행함을 느낄 때 정의된다. 불행과 고통은 내 안의 본질을 보게 하는 창문과 같다. 불행함을 이겨내는 무언가에서 행복은 오게 된다. 불행함을 느껴보지 못한 자는, 행복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된다.따라서 본인이 지금 불행하다면, ‘아 내게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행복이 왜 중요한가?

근육이 찢어지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더 단단하고 큰 근육이 되듯, 우리가 힘들고 불행하고 지칠때 행복은 우리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고 견고히 만들어 고난, 그리고 더 큰 고난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견고히 만들어진 근육은 결국 인생의 갑옷이 되어 ‘그깟 고통이 대수랴, 넘어가면 그만이지’ 와 같은 아수라의 경지에 오르게 한다. 당신이 행복한 만큼의 크기가 당신의 그릇을 만들어 낸다.

 

행복은 인생의 가치 중의 가장 첫 번째로 오는 가치이다. 즉, ‘행복’ 하나만으로도, 인생의 선택 기준으로 써 충분하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기준으로 선택을 했으니, 그 선택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결국 후회가 없는 그리고 매우 단단한 선택임을 명심하라. 돈, 명성, 타인의 시선 등의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물론 돈이나 명성이 본인의 행복요소이면 합당한듯 하다), 온전히 내 안의 행복을 기준으로 ‘나’의 인생에 대한 확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워킹나무는 가끔 인생의 선택을 다른사람에 (그들이 친구든 부모님이든) 맡기는 사람들 자주 관찰한다. 그 말은 즉, 타인의 행복 기준을 투사하여 본인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인다.

 

어떤 행복이 건강한 행복인가?

1) 굉장히 구체적이고, 2) 사소하고, 3) 지속가능한 행복이 건강한 행복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실현 가능한 행복들은 내 의지에 따라 관리 할 수 있다. 즉, 나의 행복지수를 관리할 수 있는 행복이 건강한 행복이다. 

 

당신은 바로 오늘 이내로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행복을 매일 느낄수 있는가?

 

문제는 내가 당장에 조절 할 수 없는 행복들이다. 예를들면, ‘나는 돈이 많으면 행복을 느낀다.’ 라는 행복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문제는, 돈이 얼마나 많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도 없을 뿐더러, 많은 돈을 얻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하루만에 실현 불가능 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돈이 많아지는 순간은 ‘단 한 순간’의 찰나이다. 즉, 어느정도 돈이 많아 지고 나서는 행복을 더이상 느낄 수 없다. 

 

만약 ‘부’ 가 당신의 행복의 조건이라면 그 안에서 본인이 컨트롤 가능하고 매우 구체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면, ‘나는 하루에 천원씩 저금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행동을 느낀다’. 천원은 큰 돈도 아니고, 저금을 하는 행동에 대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하루에 천원을 여러 번 저금하면 여러번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사소하고 구체적인 행복인 것이다. 

 

행복의 기준에 대한 또 안 좋은 예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결혼할 당시에 가장 행복했다’ (이 얘기는 실제로 지인으로 들은 얘기이다). 매우 위험하다. 결혼이라는 것은 단 한 번, 단 한순간이다. 결혼의 순간을 행복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더이상의 행복은 없다 (혹은 한 두번의 행복이 더 있을지도..).

 

담배와 술이 행복이 될 수 있나? 놀랍게도, 위에서 워킹나무가 제시한 세가지 조건 모두에 부합한다. 구체적이고 (담배와 술을 하는 행위 자체는 더이상 구체적일 수 없다), 사소하고 (쉽게 담배와 술을 구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하다 (매일 할 수 있다). 이 때, 워킹나무는 의문이 든다. 과연 담배와 술을 통해 몸이 망가져 인생이 지속 불가능한 상황에서 과연 술과 담배를 통한 행복은 인생을 지속하게 해줄 힘을 부여할까? 언젠가 불행을 가져올 당장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까? 답은 독자 여러분께 맡기겠다.

 

맺음말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는 모든분께 전하고 싶다. 가장 어둡고 추운 시간은 해가 뜨기 직전이다. 자신의 불행을 당연시 하지 말고, 항상 행복한 자신을 찾으려 애써 노력하고 쟁취하길 바란다. 행복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충만함을 온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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